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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를 요구하는 남자친구를 어떻게 하지요?

요즘 미국 기독교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2,000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는 베쓰키(Jeff Bethke)라는 청년이 올린 유튜브 동영상이 단연 인기다. 동영상의 제목은 “나는 종교를 증오하지만 예수는 사랑한다(Why I hate religion, but love Jesus)”. 일종의 설교인 셈인데 4분짜리 동영상에서 22살짜리 부흥사(본인은 이런 표현을 싫어 하겠지만) 는 마치 랩을 하듯 설교를 하고 있다.

지난 3월 5일자 시사주간지 타임 종교면에 “유튜브서(書)”라는 제목으로 소개될 때까지만 해도 수백만에 달하던 조회수가 두달여만에 천만을 훌쩍 뛰어 넘어 버렸다. 게다가 베쓰키의 게시물에 대한 반론도 같은 제목으로 올라와 가히 유튜브는 베쓰키 선풍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죽하면 타임지가 성서의 예언서처럼 유튜브서(Book of Youtube)라고 타이틀을 달았겠는가? 이사야서보다, 예레미야서 보다 유튜브서의 파급력이 적어도 2012년 미국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더 커 보인다.

그는 짧은 설교에서 증오한다는 것은 분개한다는 것과 같은 말인데 종교를 증오하며 예수만을 사랑한다고 별 내용 없는 이야기를 반복한다. 물론 그가 증오한다는 종교가 무엇인지 노골적으로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데서 그가 싫어한다는 종교가 어떤 것들인지는 짐작이 간다.

사실 이런 주장은 기독교 전통에서 낯선 것은 아니다. 문화신학이라는 분야의 지평을 연 신학자 틸리히(Paul Tillich) 도 기독교는 절대자를 찾아가는 종교가 아니라 절대자가 찾아온 계시 사건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나치에 저항하다 순교한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역시 나치 앞에서 침묵한 정형화된 종교의 무가치성을 경고했었다.

기독교의 독특성을 고려한다면 종교와 예수를 비교한다는 것이 전혀 틀린 것은 아니지만 다른 종교라고 해서 초월적 개입이 무시되는 것은 아니다. 선불교에서는 진리를 찾아가는 수행의 한계를 경험하고 갑작스러운 깨달음(돈오)의 개념을 생각해 내었다. 수신과 처세를 강조한 유가에서도 공자는 하늘 앞에서 겸손함을 잃지 않았으며, 노자는 처음부터 말할 수 없고 이름 붙일 수 없는 진리의 세계를 인정했다.

제프 베쓰키 (출처 : 제프 베쓰키 페이스북)

게다가 틸리히와 본회퍼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제도화된 교회에 대한 비판이었다. 본회퍼는 무종교성이야말로 세계의 성숙성의 표지라고 말한다. 이들은 서구의 주류가 되어 버린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철저하게 자기 비판함으로써 타자를 위한 교회로 변화될 것을 바라며 그들의 주장을 전개해 나갔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종교를 증오한다는 베쓰키의 선포는 들은 풍월을 가지고 펼치는 호교론에 다름 아니다. 신학적 배경도 없는 베쓰키는 시애틀의 대형교회인 마스 힐 (Mars Hill) 교회에서 설교하며 종교(교회)와 예수를 구분하고자 했던 신학자들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증오를 증폭시키고 있다.

베쓰키가 젊은이들 상대로 집회를 하면 그의 SNS에는 청중들의 많은 질문이 쏟아진다. “남자 친구가 섹스를 요구하는데 어떻게 피하지요?” 와 같은 그들의 고민을 담은 내용이 대부분인데, 베쓰키는 “그런 남자 친구와는 헤어지라”고 회신한다. 신앙이 섹스에 대해서 말해 줄 의무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삶의 일부라면 교회의 가이드라인이 신자들에게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런데 굳이 그것이 보수 세력의 관심만 끄는 것을 보면 “미국 복음주의자들의 기도는 공화당원의 기도”라는 조크가 생각난다. 베쓰키는 이런 비판을 의식한 듯 기독교인이 공화당원과 비슷하게 인식되는 것이야 말로 자기가 깨고 싶은 장벽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남의 사생활까지 침범하고 보수적 고집을 유지하려는 것을 보면 그가 공화당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종교를 증오하고 예수를 사랑한다며 ‘건전한’ 섹스의 가이드 라인만 제시하고, 다른 종교에 대한 증오만을 키우기에는 세상이 그렇게 한가하지 않다. 풀어야 할 문제가 산적한 세상에 개인의 도덕적 책무만 강조하는 것은 예수도 아니고 종교도 아니다. 일부 과격한 무슬림의 테러 행위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나, 오히려 그들은 나름 세상의 정의 문제를 고민하고 몸에 폭탄을 두른다.

베쓰키가 사랑하는 예수 역시 세상의 문제를 안고 십자가에 매달렸다. 그에 비해 베쓰키가 보여 주고 싶어하는 세상은 비겁하다. 정의와 평화에 대한 고민없이 개인적 만족을 위한 종교야 말로 가장 증오해야 할 종교다. 그것을 모르는 청년의 행보가 너무 불안하다.

종교 평론가 길벗 gilbert

2 Responses

  1. LinkedInUser말하길

    아멘이 절로 나오네요.

  2. 김용호말하길

    음.. “랩을 하듯이”라고 쓰셨는데 이 청년이 사용하는 화법은 spoken word 라고 하는 장르인데 일종의 시 읽기 입니다. 미리 써서 낭독할수도 있고 즉흥적으로 할수도 있구요.. 시는 얌전히 낭랑한 목소리로 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해외 사람들에겐 좀 충격적인 문화적 흐름인데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위키백과에 자세히 적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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